• 바라노니 반짝거리며 길고 곱게 살다 안녕히 떠나길
    DAILYLOG 2025. 3. 10.

     

     

    꽃 피는 봄이 오기 전까지는 얼추 새해 다짐 기간 아닌가?  대충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오랜만에 장을 봤다. 저속노화 대표식단 야채찜을 해 먹어야지. 비록 요리는 못하지만 아무거나 잘 먹는 1인 가구 솔로 플레이어가 가장 만만하게 할 수 있는 메뉴가 바로, 냉장고 속 모든 물질들을 다 때려 박고 양념한 물을 좀 부어 쪄 먹는 건데, 최근 저속노화 붐이 인 덕분에 평소에 해 먹던 누렁이 밥의 가치가 높아져 은근 뿌듯해하고 있었다. 뿌듯해만 했다. 양말 받을 날은 요원함에도 구르는 강도는 자의와 타의로 갈수록 높아져만 가는 도비는, 근 한 해 동안 계속 급속노화식품들만 냅다 시켜 먹어댔기 때문이다... 저속노화 선생님 말씀대로, 역시 진정한 저속노화 웰빙라이프를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들이 빨간 띠 두르고 일어나 주 3.5일제를 쟁취해야만 한다...

     

    하여간, 이번에는 쿺팡에서 식재료들을 시켜봤다. 할인템 반, 정가템 반. 대한을 지배하는 zI젼_쿺팡이지만 식재료의 신선도는 복불복 가챠에 가까워서, 매 아침 힘들게 북북 벨크로 박스를 뜯을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이번 뽑기에선 나름 선방한 편. 디저트용으로 산 딸기는 빈사 상태로 왔다. 

     

    커스터마이징 야채찜이라고 해야할지, 반(Half) 저속노화 식단이라고 해야 할진 모르겠으나, 대-충 마음에 드는 채소들을 고르고, 채소들만으로는 섭취 후 40분 만에 다시 배고파질 수 있으니 그에 대비해 토핑처럼 얹어 줄 단백질 내지 탄수화물 사이드템들을 곁들여 주면 된다. 보통 만두나 당면을 고르곤 했는데, 이번에는 단호박과 두부를 골랐다. 삶은 달걀도 괜찮은데, 언제 사 왔는지 모를 달걀은 냉장고에 존재하고 있길래 새 재료들과 잘 조합해 먹으면 될 것 같다. 

     

     

     

    렌틸콩... 이 새끼에 대해서는 할말이 많지만, 완성샷에서 그 진가가 여실히 드러날 테니까 일단 보류하기로 하고, 다짐 겸 메모만 적어놓겠다. 다음에는 병아리콩을 사 봐야지. 다시는 렌틸콩을 찜 재료용으로 데려오지 않을 것이다. 

     

    렌틸콩은, 단백질과 견과류 등등 특정 영양소의 섭취에만 미쳐있던 시절에, 이름도 특이하고 생긴 것도 이세계의 뒤틀린 초콜릿 같다고 느껴서 지성 없이 구매했었다. 미친 것이다. 초콜릿은 되도 않는 쌉소리고, 곡물처럼 생겼지만 곡물은커녕 정직한 '콩'의 맛이 난다. 본콩이 콩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아는 놈인 것이다. 콩밥 대용으로라면 꽤나 귀엽고 괜찮은 선택인데, 이번처럼 어떤 디쉬의 사이드로 참석하기에는 상당히 문제 많은 재료라 사료된다(후술). 

     

     

     

    그냥 플레인 찜으로 두고 재료맛으로만 먹어도 나쁘지 않지만, 스톡 같은 다시다류 아이템을 살짝 뿌리면 맛이 조금 더 안정된다. 살짝만. 청졍원의 치킨스톡 기준, 식사용 큰 숟가락의 1/3 내지 1/2면 충분하다. 이걸 밥그릇 반 정도 분량의 물에 희석시킨 뒤 야채찜에 넣으면 꾸안꾸스러운 비밀병기로서의 힘을 발휘함. 그 이상 넣으면 짜고 은근 비리고 얘 맛만 난다. 

     

     

     

    날로 먹는 자동 사냥을 좋아하는 즐겜러는, 요리할 때에도 적당히 끓이다가 불 끄고 뚜껑 덮고 잔열로 익히는 방식을 취한다. 딱히 가스비 절약이라든지, 기타 다른 큰 뜻은 없고, 그저 가스불 올려놓고 딴 데서 처놀다가 집을 잿더미로 만드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다. 오븐이 좋은 이유가, 시키는 대로 알아서 요리하곤 타이머에 맞춰 얄짤없이 퇴근한다는 데 있는데. 가스레인지 타이머도 설치하면 된다곤 하지만, 부엌에 그 정도의 애정을 쏟고 싶지는 않다. 

     

    적당한 불로 끓이다가 재료들이 얼추 다 익었다 싶으면 불을 끄고 뚜껑을 덮은 채 방치하면 된다. 신나게 한판 놀다가 뒤늦게 배고픔을 깨닫고 부엌에 돌아와 뚜껑을 열면 식사가 완성되어 있을 것이다. 

     

     

     

     

    분명 냄비 한 가득 끓였는데 전부 양배추와 채소들의 합작 사기였지. 익히고 나니 거의 반 정도로 부피가 줄어들었다. 저것만으로는 영 배고플 것 같기도 하고, 살짝 뒤적여 본 결과물 꼬라지가 말이 아니라, 황급히 바질 어묵을 꺼냈다. 

     

     

    부산으로 출장 다녀온 지인에게 선물 받은 고래사 어묵이다. 패키지의 간단 설명처럼 핑거푸드용으로 나온 아이템이고, 같은 라인에 주황색 패키지의 치즈 어묵도 있다. 이건 이번에 처음 까 봄. 바질이 섞여서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식사에 곁들여 먹는 용도로든, 본연의 안주 용도로든, 치즈가 훨씬 낫다... 바질향이 (어쩔 수 없이) 너무 강함. 바질 어묵을 먹어야 한다면, 차라리 얘를 솔로로 메인에 두고 주변 먹거리들을 얘에 맞춰 조합해 데뷔시키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완성된 저속노화 식단은 상당히 개밥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보기보다 맛은 좋다 -- 애초에 각각의 맛을 좋아하는 식재료들로 구성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저렇게 합쳐 끓였다고 해서 그 하나하나가 망가지진 않아서. 그냥, 먹기 좋도록 따끈따끈하게 데운 음식물의 조합이라고 해야 할까? 음. 어째, 설명하려 할수록 개밥을 애써 영업하려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만두도록 하겠다.

    이번 야채찜의 조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특정 재료들이 너무 존재감이 강했다.

    • 양배추와 새송이야, 뭐, 애초에 배경색 내지 배경음악처럼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놈들이니 괜찮다. 표고는 맛있지만 향이 꽤 강해서 조심히 써야 하고, 팽이는 식감이 너무 튀어서 식재료로선 채용하지 않는 편이다. 
    • 생각보다 단호박이 이런 찜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처음 써 봐서 몰랐어... 고작 3조각만 넣었을 뿐인데 엄청난 풍채를 과시했다. 냄비를 열자마자 단호박향이 제일 먼저 났어.
    • 샐러리는 평범한 샐러리다. 주변에 은은하게 향만 좀 풍기고 말지, 딱히 맛에는 영향을 안 미치는데, 샐러리를 집어 먹으면 그제서야 샐러리 맛이 남.
    • 렌틸콩. 개밥 비쥬얼을 만드는, 냄비 안 식재료들을 갈색으로 염색시킨 주범이다. 앞서 말했듯, 곡물처럼 생겼지만 진솔한 콩맛이 난다. 꼬소하면서도 사람에 따라 비리게 느낄 수도 있을, 콩스러운 질감, 향과 맛이 있음.
    • 당근도 의외로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은 적었다. 주변을 주황색으로 물들이면서 당근 냄새를 퍼뜨릴 줄 알았는데. 먹으면 당근맛이긴 했다. 아니면.. 단호박과 바질 어묵이 워낙 쟁쟁한 경쟁자라 약하게 느꼈나? 지금으로선 알 수 없음이다.

     

     

    입가심으로 먹은 딸기. 받는 시점에서부터 꽤나 많은 부분이 하얗게 물러 있었다. 고민하다가 그냥 대충 집어 먹기로 함. 예쁘고 단단한 과육이 아니라 실망은 했지만, 맛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할인율이.. 그렇게 크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치사한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부역자들... 언젠가 이 세상이 멸망할 즈음에는 기필코 복수하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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